Sunday, February 9, 2014

아브라함의 모습;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창21:22-34)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 왜 저를 그렇게 공부시켜 주시고 살려주셨는지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하소서......
세상의 성공적 관점이 아니라
고난속에서 감사하고
환난속에서 소망을 갖고
고통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시각속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브엘세바(브엘:우물; 세바: 일곱)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아브라함.....

제가 어느 곳에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증거하는 삶 살게 하소서.

제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샘물입니다.
이곳에서 제가 심어야 할 것은 섬김입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옵소서.
감사함으로
겸손함으로
기쁨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그 부름이
참된 평화와 평안을 불러오는 소리 되게 하소서.

소리없이
묵묵히
포기 하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부르게 하소서..




Tuesday, February 4, 2014

소돔 속 롯도 진지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창19:12-22)

계속해서 저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진실과 사랑으로 대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소돔에 있던 롯,
떠나기를 지체했던 롯,
두려움에 어찌 할 바를 몰랐던 롯


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제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롯이 지체했을 때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16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직접 이끄셨고, 그것은 그 분의 자비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16

롯의 잘못된 선택으로 소돔에 살게 되었고, 그 속에서 넘쳐나는 죄때문이라도 멸망속에 함께 들어가도 정당한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멸망을 경고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는 롯을 향해 노하시고, 질책하시기 보다는 자비를 주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저 같은 어리석고 주저하는 죄인에게도 자비로우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롯을 이끌어 낸 후에도 롯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처음의 권고(17)를 감당할 수 없자,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제안을 합니다.(18-20)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20)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또 다시
자신의 처음의 계획과 다르게 자신의 논리와 주장으로 대하는 롯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자비와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며 약속해 주십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22).

제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다릅니다.

물론 상황이 다른 상황들이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참으로 저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그 분의 자비와 사랑가운데
항상 진실되게 인내로 저를 설득하시고 관계하심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부족하고 아픔 많은 기독교학교들을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회복시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주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관계할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Sunday, February 2, 2014

아브라함과 진지하게 소통하신 하나님(창18:16-33)

요즘 한국사회에서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말입니다.
그 반대로 '불통'이라는 단어도 자주 듣게 됩니다.

권위를 가진자와 그 권위 아래에 있는 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이 소통이 되는가 아니면 불통이 되는가는 그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오늘 말씀중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지음받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열어 그 낮은 인간에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집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18:20-21).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을셨을 까요?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를 상의하거나 미리 알리실 필요가 없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인격은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분의 인품과 사랑으로 자신의 생각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단지 통보의 형식이 아니라 진실된 소통을 위해서 그 높으신 창조주께서 그 낮은 피조물에게 대화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서 다음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인내하며 들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18:22-3) 이렇게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통보의 형태로 가 아니라 대화의 형태도 언제든지 그 권위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지신 하나님의 인격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리더들은 성도들에게, 학교에서 리더들은 교사와 학부모에게, 학급에게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런 진심어린 태도를 서로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태도를 옳다는 이유만으로 그 길을 가는 지 모르겠습니다. 성경말씀이 어떤 것을 말한다고 강하게 밀어부치는 태도를 우리는 가정과 교회, 기독교학교에서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낮아지시고, 사랑으로 그 허리를 숙이시고, 직접 희생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 아들을 죽음에까지 내어 놓으신 것 아니신가요?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8)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권위적으로 일방통로의 모습으로 소통하려고 하니 불통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이야기들까지도 들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3)
"의인 오십명이 있을지라도,,,,,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4)
이런 이야기를 듣는 하나님은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이 그런 지혜도 없이 이런일을 계획하고 또 정의롭지 못하게 심판하는 자로서 인식하는 아브라함을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소통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권위의 태도는 이 시대에 많이 없어 보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들어시는 여호와 앞에 아브라함은 점점 겸손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권위있는 자로서 사랑과 인내로 소통하려고 하면 상대방은 점점 겸손해 져서 한 뜻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18장 22-33절 말씀을 살펴 보면, 이 권위자와 권위아래 있는 자의 불통은 잘못된 권위 사용의 문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권위자에 대한 불순종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종됨과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겸손한 요구의 태도를 보입니다.
처음에의 의사표현 보다 점점 더 대화를 해 나가면 할 수 록 낮아짐으로 소통합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18:27)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상)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31상)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32상)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30, 31, 32)

이렇게 낮은 자세로 간구하는 태도가 권위 아래에 있는 자들은 필요합니다.
권위를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형제이자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권위자입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이런 권위아래 순종하는 것의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사장과 교장과의 갈등, 교장과 교사들의 갈등,  교사와 부모의 갈등, 부모와 학교관계자와의 갈등, 교사와 학생들의 갈등 속에서 모두가 자신의 태도를 겸손히 하는 것이 중요한 갈등 해결의 핵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생각으로 시작된 50명의 기준에도 응답하시며 대화를 멈추지 않게 하셨습니다.
"내가 만이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26)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32)

이렇게 대화는 진지하게 이루어져 각기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19)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은 참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7)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태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가정, 교회, 학교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권위를 인정하는 아브라함과 주님의 태도를 진정성있게 보이며 소통하려고 하는 태도가 꼭 필요합니다.
권위를 가진 자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삶을 어떻게 간섭하시고 사랑하시는 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 권위를 행사할 때에 그 분의 태도로 사랑과 인내로 소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서 많이 실패한 사람이며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이런 주님의 자세 없이는 분열과 갈등속에 파묻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와 학교운동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가 서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로 소통하지 못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배우고 겸손과 사랑으로 소통하는 태도를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 없이 우리 다음세대에 하나님앞에 겸손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